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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이후 10년 만에 신작 ‘아메리칸 학원’을 펴내는 재미 작가 이민진(58)과 서면으로 만났다. 국내 출판사는 현대문학. 오는 29일 전 세계 동시 출간을 앞두고 작가가 뉴욕 할렘의 집에서 쓴 긴 답변을 이메일로 보내왔다. “세계 방방곡곡에 사는 한국인 수천 명과 이야기를 나눴다”는 그는 “각자의 아주 특별하고 개인적인 이유들 속에서 공통의 후렴구 같은 말을 들었다”고 책 서두에 쓴다. 이는 “내 자식들에게 더 나은 교육 기회를 주고 싶었다”는 말이다.
‘아메리칸 학원’은 한국인의 뜨거운 교육열을 비추는 동시에, 진정한 배움이란 무엇인가 묻는 작품이다. 1992~2007년 고씨 가족(부모 존과 헬렌, 자녀 보·DH·미도)의 삶을 통해 이를 보여준다. 한국·시드니·캘리포니아로 장소를 옮기며 장대한 서사를 펼친다. 올 하반기 대작 중 하나다. ‘장편의 맛’을 기다려 온 독자라면 기대해도 좋다. 지면 기사(9월 23일 자 “90년대 한국인 가정의 이민史… 떠돌면서도 ‘배움’ 놓지 않아”)에는 다 담지 못한 작가의 말을 싣는다.
다음은 이민진 작가와의 일문일답.
–‘파친코’ 이후 약 10년 만에 신작 ‘아메리칸 학원’으로 돌아온 소감과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이 소설로 독자를 다시 만나게 돼 감사하다. 다른 무엇보다 가장 쓰고 싶었던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또 10년이 걸리지는 않길 바랐는데, 그렇게 됐다. 이 이야기를 쓰는 데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따를지, 또 얼마나 많은 것을 새로 배워야 할지 미처 몰랐다. 지난 10년간 개인적으로 여러 번의 좌절과 상실을 겪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아마도 그런 경험이 즐거웠던 순간보다 내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 것 같다. 어른이 되어 배우는 일이 조금 덜 힘들어도 좋을 텐데 말이다.”
–자신을 종종 ‘거북이’에 비유한다.
“나는 토끼가 되는 법을 모른다. 내가 거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더 빨리 배우고, 더 빨리 생각하고, 더 빨리 일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평생을 살았다. 그런 속도를 지닌 사람들을 존경하지만, 어떻게 그러는지 나는 모르겠다. 나는 승자(winner)라고 느끼진 않지만, 끝까지 해내는 사람(finisher)이다. 느리지만, 꾸준하다. 분명한 사람이고 약속한 일은 반드시 하는, 믿을 만한 사람이다.”
–신작 ‘아메리칸 학원’을 한 문장에 담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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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외환 위기 이후 글로벌 금융 위기 사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가족이 생존하고 가정을 꾸려 나가기 위해 서울·시드니·캘리포니아로 이주하는 이야기.”
–‘학원(Hagwon)’이라는 한국어를 그대로 썼다. 전 세계 독자에겐 이 단어가 낯설 텐데.
“한국어를 구사하지 않는 이들은 ‘학원’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알게 되길 바란다. 미국에도 구몬(일본에서 유래), 프린스턴 리뷰, 카플란 같은 일종의 학원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미국인은 한국에는 공무원 시험 준비, 사교 댄스, 악기, 모의 유엔(UN), 언어, 펜싱에 이르기까지 온갖 학원이 있다는 것을 미처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한국에선 너무나 익숙한 이 학원 문화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다.”
–그렇다면 ‘아메리칸 학원’은 어떤 의미인가.
“‘학원’은 이 소설을 관통하는 핵심 은유다. 말 그대로 미국인이 만들어내는, 한국의 학원과는 또 다른 형태의 학원 혹은 삶 그 자체에서 배우는 경험에 관한 이야기다.”
–이번 소설을 독자와 가장 나누고픈 소설로 꼽았다.
“한반도에 사는 한국인뿐 아니라 해외에 사는 한국인(diasporic Koreans)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싶었다. 시민권 여부와 관계없이 한국인을 하나로 묶는 공통의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였다. 나는 ‘무엇이 한국인을 가장 한국인답게 만드는가’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한국인은 교육에 강한 열의와 신념을 지닌다는 것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현대문학
–한국인의 남다른 교육열, 과도한 집착은 아닐까. 한국의 교육열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분석한 바가 있다면.
“엘리트 교육을 중시하는 경향은 유교의 영향뿐 아니라 한국의 역사·경제·정치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지만, 근대 국가이자 민주주의 국가로서는 역사가 매우 짧다는 。에서 여러 겹의 긴장을 안고 있다. 지정학적 위치 또한 정치적 긴장과 개인적 스트레스를 낳는 요인이다. 이처럼 안팎에서 가해지는 압력은, 개인이 스스로 매번 올바른 선택, 심지어 완벽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압박을 키운다. 시스템이 개인을 지켜주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부담이 어떤 이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것일 수 있다. 언제나 올바르고 완벽한 선택만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기에.”
–그러나 이런 교육열이 한국의 성장 동력이 된 면도 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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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전반적인 역량 수준이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높은 것은 사실이다. 나는 한국인들이 이에 대해 충분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인들이 지금까지 기울여 온 노력과 성취를 제대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부터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 직전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는다.
“두 차례의 금융 위기는 물려받은 재산이 없는 한국 중산층 가정에 결정적인 압박으로 작용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좋은 교육을 받은 이들도 IMF 외환 위기 당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 현실을 좀 더 깊이 이해하고 싶었다. 대부분의 미국인은 IMF 외환 위기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반면,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안다. IMF 사태가 한 사람의 학업, 취업 전망, 배우자 선택, 자녀를 낳고 기르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삶의 수많은 결정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하지만 당시 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세계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국내외 한국인들이 처했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맥락을 제공하고 싶었다.”
–‘파친코’의 첫 문장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는 두고두고 회자된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의 첫 문장은 “능력은 저주일 수 있다(Competence can be a curse)”였다. 짧고 굵은 첫 문장으로 소설 전체를 아우른다. 이번 소설의 첫 문장은.
“나는 상당한 공을 들인 후에야 첫 문장에 도달한다. 내가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어느 정도 분명해졌을 때 비로소 첫 문장이 나온다. 내 첫 문장들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문(thesis statement)이다. 이번 소설의 첫 문장 ‘삶의 규칙은 이미 바뀌었다(The rules of engagement have changed already)’에는 이런 생각이 담겼다. 오늘날 우리는 알지 못하고, 동의한 적도 없는 사이에 변화가 일어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며, 그럼에도 그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엄청난 속도로 밀려드는 변화와 그 변화를 일으키는 거대한 힘 앞에서 현대인이 느끼는 깊은 불안과 무력감을 담고 있기도 하다.”
–소설의 1부는 미국 작가 제임스 볼드윈의 인용으로 문을 연다. “교육의 역설은 이러하다. 교육을 통해 자각이 시작되면 자신을 교육하는 사회를 따져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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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용구를 정말 좋아한다. 진정한 배움은 서서히 이루어지는 과정이라는 。을 잘 헤아리고 있다. 정말로 무언가를 배우고 있다면, 필연적으로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를 의심하고 질문을 던지게 된다. 볼드윈은 그 。을 예리하게 꿰뚫어봤다.”
ⓒElena Seibert
–잠시 거북이 이야기로 돌아와서, 어쩌면 ‘아메리칸 학원’은 “거북이여도 괜찮다”는 말을 하는 듯하다. 삶에 관한 진정한 배움은 느리게,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이란 의미에서.
“거북이로 살아가는 건 때론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다. 주어진 시간,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으니. 그러나 살아가는 동안 계속 배우고 변화에 적응할 수 있다면, 거북이로 사는 것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의 방식일 수 있다. 속도보다는 배움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이 배워야 할 것을 외면하고, 자신의 실망 속에 붙들려 있곤 한다. 우리는 대개 교육을 사람의 훌륭함이나 발전과 동일시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많이 배운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직선으로 나아가며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 속 고씨 가족의 막내딸 미도가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대학을 중퇴한 미도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고민한다. 삶과 부딪치며 배운다.
“미도는 신중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보다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더 중요하게 여기면서 더욱 강한 사람으로 성장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생각과 선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때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계속 선택한다. 나는 미도가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걸 안다. 하지만 세상은 사람들을 판단할 때 자주 틀리는 편이다. 우리는 눈앞의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진정으로 들여다보는 데 좀처럼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당신 소설 세 편을 각각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은 선택(Choice), ‘파친코’는 집(Home), ‘아메리칸 학원’은 ‘공동체(Community).”
“알릴 만한 내용은 없다.”
–차기작으로 알려진 ‘마셜 플랜’은.
“독일로 건너가 간호사와 광부로 일한 한국인들, 그리고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유럽으로 떠난 한국인들에 대해 쓸 예정이다. 군인과 결혼한 여성들의 삶도 비중 있게 다루려 한다. 해외에서 고국으로 송금한 돈(remittances)과 재건(rebuilding)에 관한 소설을 쓰고 싶다. 시대적 배경은 1961년부터 1989년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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